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거우차오 사건 (문단 편집) == 배경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arco_Polo_Bridge_Incident_1.jpg|width=100%]]}}}|| || 사건 직전 중일 양국의 병력 배치도 || [[청나라]]와 [[중화민국 북양정부|북양정부]]의 수도이자 북방 최대의 도시인 [[베이징시|베이핑]] 근처에는 [[의화단 운동]] 이후의 [[신축조약]]의 영향으로 1,800여 명의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국민당의 2차 북벌]]이 성공한 이후 국민정부가 불평등조약을 개정하겠다는 수약외교를 선포하자 각 열강은 국민정부를 승인하고 군대를 축소하거나 아예 철수하였지만, 일본만은 완강하게 조약 개정을 거부하였으며 오히려 1931년 [[만주사변]], 1933년 [[열하사변]] 이후 [[당고정전협정]], [[하매 협정]], [[진토 협정]]을 거쳐 군대를 5,600여명까지 증강시켰다. 이들은 톈진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하북의 요충지에 병력을 주둔시켜 언제라도 [[허베이성]]을 침탈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한편 베이핑 서남쪽에 연결된 루거우차오는 베이핑과 [[https://ko.wikipedia.org/wiki/융딩허|융딩허]]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로 베이핑을 유지하기 위한 생명줄이나 마찬가지였다.[* 펑타이구에 있고, 서5환 근처이다. 현재 이곳은 박물관이 있으며, [[치리좡역]]과 [[장궈좡역]](치리좡역이 더 많다)으로 가는 셔틀버스가 있다.] 일본군이 베이핑을 3방면에서 포위하고 베이핑의 안보를 위협하자 [[진토 협정]]에 따라 차하얼성에서 철수하여 허베이성으로 이동한 [[https://baike.baidu.com/item/冀察政务委员会/8547401|기찰정무위원회]] 위원장 [[쑹저위안]]이 지휘하는 국민당군 제29군이 핑진(平津, 베이'''핑'''과 톈'''진'''을 아우르는 말.) 지역의 수비를 맡게 되었다. 29군 산하에는 4개 보병사단, 1개 기병사단, 3개 독립여단 등 8만의 병력이 있었으며 그외에 차하얼성에서 허베이성 전역에 걸쳐 동북군 잔여세력, [[옌시산]] 세력, [[펑위샹]] 잔여세력 등을 합쳐 총 23만명의 중국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중에서 루거우차오 서쪽은 일본군이, 동쪽과 완핑현성은 [[https://zh.wikipedia.org/wiki/冯治安|펑즈안]]의 37사단이 수비하고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https://zh.wikipedia.org/wiki/吉星文|지싱원]]의 21구단이 루거우차오의 수비를 담당했다. 한편 국민정부와 일본 제국 사이의 최후의 외교적 협상이 결렬되자 일본은 [[화북분리공작]]에 박차를 가하여 루거우차오 인근에서 연일 군사훈련을 벌이며 무력시위를 하였다. 또한 일본군은 [[https://ko.wikipedia.org/wiki/펑타이구|펑타이]]에서 루거우차오에 이르는 6천 헥타르에 달하는 토지를 구입하여 비행장을 건설하려 했으나, 지주들은 일본군이 막대한 금액을 불러도 땅을 팔지 않고 저항했다. 이에 분노한 일본은 행정당국을 압박하는 한편, 훈련 빈도를 더하여 중화민국을 더욱 도발하였다. 관동군 참모장 [[도조 히데키]]는 6월 6일 "일본 쪽에서 적극적으로 친선을 구하는 것은 배일, 매일의 태도를 증가시킬 뿐이므로 차라리 일격을 가할 필요가 있다"고 육군 중앙에 상신하였으며, 6월 16일 동북에 2만명의 일본군이 증강되었다. 그리고 일본군은 6월 25일 루거우차오에서 장기 훈련을 실시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